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민 알후세이니 (문단 편집) == 나치와의 협력 == || "아랍인들이여, 최후의 단 한 명까지 봉기하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싸우라.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버려라. 이것은 알라와 역사와 우리의 땅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명예를 지킬 것이며, 알라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 예루살렘 대율법관 및 전 팔레스타인 정부 대통령 및 팔레스틴 민족평의회 의장 아민 알후세이니[* [[https://en.wikipedia.org/wiki/Haj_Amin_al-Husseini#Ties_with_the_Axis_Powers_during_World_War_II]]] || 1939년 그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마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나라로서 피지배민족들을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실상이 알려진 건 전후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하였다.[* 헌데 오늘날에도 제3세계에서 나치와 히틀러보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식민제국들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당장 인도만 보더라도 히틀러의 이름을 딴 정치인이 존재하고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까지 만들기까지 하니...[[핀란드]]도 [[소련]]의 침공 때문에 [[나치 독일]]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특이한 사례.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집권기에 [[나치의 남미 도주|아예 나치 인사들의 망명을 거의 대놓고 받아줬다]].] 아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구금당했다. 아랍인 민족국가를 세우는 사회운동의 원동력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민은 강력한 [[반유대주의]]를 제창하고 있었던 나치와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하였다. 이라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41년 4월 [[이라크 왕국|이라크]]는 영국의 괴뢰정부로 자원셔틀 신세였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한 달만에 발렸다. 1941년 10월 이탈리아를 방문한 아민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갈레아초 치아노]]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확약을 받았으며 11월에 독일을 방문해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유럽에서 유대-볼셰비즘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발언하였고 이에 아민은 반색하면서 그 계획을 중동으로 확장시켜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의 유대인을 모두 죽여 달라고 요청했으며 나치의 아랍 독립운동 지원도 요청하였으나 히틀러는 중동을 무솔리니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지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아랍인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민의 요청에 대해서 답변을 회피했다.[* Meir Litvak, Netanyahu and the Mufti: Hajj Amin al-Husseini as Prime Instigator of 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ry or Eager Accessory?(2015)] 이후 이라크 왕국 총리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와 함께 히틀러에게 아랍 독립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계속 청원하였으나 히틀러는 다른 동맹국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이를 회피했으며 아민의 아랍 독립 선언의 공개를 금지하는 한편 아랍자유군을 창설하게 해 달라는 아민의 요청도 거부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7-004-09A%2C_Amin_al_Husseini_und_Adolf_Hitler.jpg]] [[아돌프 히틀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Alber-164-18A%2C_Gro%C3%9Fmufti_Amin_al_Husseini%2C_Heinrich_Himmler.jpg]] [[하인리히 힘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힘러와는 나치 정권 수립 이후인 1933년부터 서신을 교환히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42년 아민은 아예 독일에 정착하였다. 1943년부터 나치에 대한 협력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이 성과가 "[[제13무장산악사단]]"으로 모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초반까지만 해도 모병 방법조차 헤매고 있다가 아민 알후세이니의 도움으로 대규모의 무슬림을 영입하였다. 나치는 이후 [[한트샤르]]에 크로아티아 기독교인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사실상 통합이 불가능했다. 이후 아민은 [[홀로코스트]]에도 적극 개입해 <라디오 베를린>에 나타나 유대인을 온 인류의 적으로 선전하면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43년 5월 [[불가리아 왕국]]이 4천명의 유대인 '''아이'''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탈출을 허용하자 아민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장관에게 격노를 표출하면서 있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맹비난했고 이탈리아, 독일, 불가리아, 헝가리 외무성을 닦달하여 유대인놈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아민이 홀로코스트의 광병적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아랍 민족 전체에 개망신 중의 개망신이므로 아랍 학자들은 아민이 [[시오니즘]]과 [[나치즘]]이라는 두 인종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실드치려고 했지만 문서고 전체에 아민이 유대인 쳐죽이라고 요구한 게 다 남아 있어서 아랍의 미화 시도는 학계에서 연구가 아니라 선전선동의 일환이라고 깔끔하게 무시당한다. 아민 본인부터가 2차 대전에서 재수좋게 살아남은 다음에 히틀러가 [[밸푸어 선언]]에 충격을 받아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으며 독일이 [[내부로부터의 중상]]에 망한 게 맞다는 사이비 역사소설을 지어내고 다녔다.[* Zvi Elpeleg, The Grand Mufti: Haj Amin al-Hussaini, Founder of the Palestinian National Movement (London, 1993)] 1945년 나치가 패망하자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석방되었는데 [[소련]]에 잡혔다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물건너가고 해당 지역은 애매한 상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설명하지만 이 인간이 민족의 독립이랍시고 추축국의 지원을 받으려고 한 것이 이후에 공개되어서 팔레스타인 독립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앞서 저질러진 세르비아인 학살 문제 때문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가 잡아 죽이려는 것을([[http://www.militantislammonitor.org/article/id/3381|참고]])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목숨은 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